Requiem, K.626 감상

어느 가을부터 겨울까지 줄창 들었고 여전히 찬 바람 불기 시작하면 생각이 난다. 10여 종의 음반을 들었는데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번스타인이 지휘한 DG 반이다.

레퀴엠, 장송곡.
장송 미사를 위해 만들어진 형태인데 죽은 자보다는 오히려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껏 감정을 고조시켰다가 팽팽하게 당긴 끈을 놓는 것처럼 Lacrimosa에서 일순간 탁- 놓으며 사그라듬을 유도하는 그 짜임에서 보았을 때. 마치 빈사의 백조의 마지막 장면, 백조가 날아오르려다가 순간 문득 꺾이면서 바닥으로 살짝 내려앉고 그 날개가, 하늘로 향하던 그 날개가 조용히 내려 앉아 접히고 고개가 힘없이 꺾이며 마지막으로 날개가 한 번 더 하늘을 향하다가 다시 내려오는, 그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번스타인의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공연 실황을 녹음한 것인데 그의 다른 작품 해석을 생각해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번스타인은 대체적으로 흐름을 크게 잡고 디테일에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 편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바그너 녹음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연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해석은 하나의 큰 흐름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감정'이 곳곳에 녹아 있는데 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템포 조절과 악기군의 비중의 재배치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진노의 날은 의외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엄청나다. 그 힘이 후반부로 갈 수록 농축되다가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돋게 만든다. 그 극단적이면서도 탁월한 완급조절은 지금까지 다른 지휘자들의 해석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번스타인 자신이 다시 연주했더라도 그와 같은 오묘한 조절은 불가능할 것이라 본다.

또한 호른의 재해석을 통해 잉글리시 호른을 배치하고 현의 비중을 줄여서 중량감 있는 음을 조형해냈으나 동시에 경쾌하고 마치 레일을 따라 내달리는 듯한 산뜻함과 속도감을 부여한 것은 (감히 말하건데) 번스타인 최대의 역작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독창과 합창 역시 실황 연주 녹음에서 흔히 보이는 소리가 뭉개지거나, 묻히거나 심지어 공명해버리는 일이 보이질 않는다. 이 연주가 1988년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관악과의 차별성이 두드러지며 딕션이 꼼꼼하게 살아있고 독창자의 목소리가 합창에 묻히지도 그렇다고 아예 두드러지게 튀지도 않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합창 지휘자와 녹음 기술자에게도 찬사를. 하긴, 당시 DG의 녹음 기술은 꽤 훌륭했다. EMI의 것이 후진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연주에 대해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템포 설정이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빨라서 현이 투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부분도 있으며 심지어 합창의 템포가 너무 빨라서 관악과 맞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부분에서도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표정이 어떠했을까, 그 지휘모습이 어떠했을까, 그걸 보는 단원들과 합창자들, 독창자들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오히려 이해할 수도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이 처연하게 떠오를 때, 듣는 것을 추천한다. 너무나 가슴이 아플 때, 어떤 위로도 마음에 닿지 않을 때, 노지휘자의 감정과 관현악 그리고 성악 속에 배어있는 진한 상실감이 오히려 큰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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